다산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고통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임에도 자신보다 더 불우한 환경의 흑산도에서 귀양 살던 형(약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형님을 위로하고, 형님과 학문을 토론하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네 살 터울의 형과는 학문은 동급수준이었으며, 세상을 개혁하고 변화시켜야만 된다는 같은 수준의 개혁 의지, 썩고 병든 나라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애타는 애국심,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혈육의 정을 나누며, 깊고 깊던 형제의 우애까지 겹쳐, 그들은 학문토론과 세상 걱정을 함께 했다.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다산이 형에게 올린 편지는 인간 다산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비록 귀양살이 신세이지만 몇 떼기의 땅이 있어 식량 걱정이 없고, 거처하던 다산초당은 아이나 아낙네들의 울음이나 탄식도 들리지 않아 학문연구에는 신선 세계와 같은 곳인데도 “아비규환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 심사가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내이겠습니까?”라고 속마음을 형에게 토로해 비치면서 스스로 답을 한다.
“이 이야기는 억지로 지어낸 말이 아니라 마음속 계획이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으니, 사람의 본성이 본래 나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명코 간음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의 아내나 첩을 도적질하려 하고, 분명코 가정파탄을 알면서도 더러는 마작이나 놀음을 하듯이, 저의 돌아가고픈 마음도 이런 심정이지 어찌 본심이겠습니까?”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조용하고 깨끗하여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원 없이 학문의 즐거움을 누리는 본심이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마다 풀려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떠난 적이 없다는 심사, 그런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다산의 고백이 가슴에 의미 깊게 다가온다.
간음은 그른 일이고, 도박이 가정을 파탄시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일에 빠지게 된다는 나약한 인간의 마음, 그래서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야만에서 문명의 길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 비이성적인 욕구가 있다.
그런 비이성적인 욕구를 얼마나 절제하느냐에 따라 문명 세계의 척도가 결정될 것이다.
순간적인 비이성적 욕구를 이겨내지 못하다가 몰락구조에 빠지고 마는 것이 인간사임에도 욕구의 절제를 순간 소홀히 하다가 파멸에 이르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방황하던 심사를 솔직하게 고백한 다산의 마음이 생각된다.
‘욕구의 절제’,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실형을 받으면 재산을 모두 국가에 기부하겠다고 장담하던 전 국회의원의 마음도 그 욕구의 절제를 순간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