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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이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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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바꾸고 있다.

감염으로 인한, 혹은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변화는 피치 못할 일이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인한 변화 역시 작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도 이견이 존재한다.

지나친 두려움으로 인해 사회 전체가 마비되고 혐오와 배제가 자행됨으로써 더 큰 피해가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가 하면, 두려움이 무뎌져서 조심할 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확산을 멈추기 어렵다는 걱정도 있다.

차승현3.jpg
차승현 작가

 

정보와 시각의 차이로 인한 것이겠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두려움’이라는 어휘 자체가 이중적인 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시선이 온통 두려움의 대상에 가 있으면 그 두려움은 끊임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

대개의 두려움이 알지 못하는 존재, 가보지 않은 길로 인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신종’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제까지 인류가 알지 못하던 존재다.

앞으로 이 확산이 수그러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할 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뒤에 놓인 사회적, 경제적 난관으로 가득 찬 길을 우리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두려울 수밖에 없다.

다만 이 두려움이 우리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도록 마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줄어들었다는 흑사병 창궐기에 비교한다면 지금 우리의 의학 보건 지식은 매우 발달하고, 그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매체 역시 신속하고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의 두려움에 기대어 특정 집단이나 지역, 혹은 정치적 상대를 마녀사냥 하듯이 비난하고 낙인찍는다면, 그리고 지식 전달의 매체들이 두려움을 왜곡하고 증폭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면, 우리의 두려움은 이유도 모르고 죽어갔던 흑사병 환자들보다 더 커질 수도 있다.

우리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아직 오지 않은 현실을 신중하게 준비하되,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실상과 허상의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다시금 마음을 바로잡을 일이다.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두려움에 마음이 잠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코로나19라는 이 신종 바이러스를 완전히 알게 되면 두려움이 끝날까?

이것이 야기할 엄청난 사회경제적 시련을 다 겪고 나면 더 이상 두려움이 없을까?

코로나19로 인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힘이지만,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가 전 지구를 활보할 수 있게 한 것 역시 과학기술의 힘이다.

인류의 교통수단이 퇴보하지 않는 한, 새로운 바이러스의 확산 주기와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것이다.

사회경제적 연결망이 촘촘해지면 촘촘해질수록 어느 한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상궁지조(傷弓之鳥)’라는 말이 있다.

한 번 화살을 맞아본 새는 활시위 소리만 듣고도 높이 날아오른다는 말이다.

하나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면 또 다른 두려움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증대될 것이다.

회피와 모면은 두려움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길은 두려움의 자세에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느껴가고 있다.

완전한 격리로 자신의 건강은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함께 감염병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우리 각자의 일상 역시 회복될 수 없다.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들에 의해 다시금 지역 감염이 확산된다면, 이 어려운 시기가 얼마나 더 오래 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뿐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두려움의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이 위기를 이겨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 또 닥쳐올 두려움들을 공동체로서 해쳐나갈 수 있는 좋은 경험 자산을 가지게 될 것이다.

부디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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