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야소의 국면이 되자 여당은 국회 상임 위원장직을 다수당이 모두 맡도록 해야 한다고 말을 했었다.
야당이 위원장을 맡은 상임위에서 파행이 거듭되고 있다며, 책임정치의 구현을 위해서는 다수당이 모든 상임위원장을 맡는 게 옳다는 것이다.
책임정치를 하려면 다수당이 나설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야당은 독재주의적 발상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었다.
심지어는 이에 대해 "다수당이 상임위원장을 독점한 것은 독재정권 시절의 일이었다."며, "독재 시절로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한다."고 비난을 해댔다.
또한 이러다가는 아예 국회를 없애자고 하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말을 했었다.
이것은 현재 처해있는 21대 국회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과의 국회 상임위원장 배분을 놓고 벌어졌던 근 12년 전의 일이다.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지역의 주민들은 지역감정의 차이로 인해 서로의 사이가 매우 나쁘다고 한다.
그들은 마치 원수처럼 서로가 척을 지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1492년 스페인이 통일된 후, 바르셀로나는 마드리드 정권으로부터 엄청난 압박과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언어도 자기들만의 언어를 고수하고, 지금도 분리 독립을 꾸준히 주장해오고 있다.
그런데 동 시대에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테너 성악가 두 명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한 명씩 나왔는데, 마드리드 출신의 ‘플라시도 도밍고’와 바르셀로나 출신의 ‘호세 카레라스’가 바로 그들인 것이다.
두 사람은 역시 서로 경쟁자인 데다가 배타적 지역 정서가 강하다 보니, 표면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 영향으로 인해 줄곧 상대방이 나오는 공연무대에는 절대로 함께 서지를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끔은 서로 상대 경쟁자를 폄훼하는 비평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1987년, ‘호세 카레라스’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그는 ‘플라시도 도밍고’보다 훨씬 더 상대하기 힘든 강적, 심한 백혈병에 걸렸다.
당연히 병원치료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쏟아 부었지만 쉽게 병이 잡히질 않았던 차에 그즈음, 그는 마드리드에 “헤르모사 재단”이라는 자선단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헤르모사 재단”은 전문적으로 백혈병 환자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는데 호세 카레라스는 “헤르모사 재단”에 도움 신청서를 보냈고, “헤르모사 재단”의 큰 도움에 힘입어 마침내 백혈병을 극복하고, 다시금 테너 가수로 재기에 성공하여 세계적인 테너 성악가에 걸맞을 많은 수입을 얻자 “헤르모사 재단”에 기부금을 보내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는 “헤르모사 재단”의 정관을 읽어 보고는 깜짝 놀랐는데, 그 재단의 창립자가 다름이 아닌 그의 경쟁자인 ‘플라시도 도밍고’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시도 도밍고’가 병든 ‘호세 카레라스’를 돕기 위해, 일부러 그 재단을 설립했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플라시도 도밍고’는 ‘호세 카레라스’가 혹시 경쟁자의 도움을 받는다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줄곧 익명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 사실에 크게 감동을 한 ‘호세 카레라스’는 마드리드에서 열린 ‘플라시도 도밍고’의 공연장을 찾아 도밍고와 주위의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는데, 카레라스는 공연 도중 무대로 올라가서 도밍고의 발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공개적으로 감사의 말을 건넨 뒤에 그동안의 여러 부족함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던 것이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플라시도 도밍고가 그를 일으켜 세우자, 두 사람은 객석의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와 환호성을 받았으며, 서로는 한참 동안 뜨겁게 끌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위대한 우정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배려와 용서를 통해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봉사할 줄 아는 큰 그릇이 되었으면 좋겠다.